최근 용산 치이카와 매장 앞에 늘어선 대기 행렬이 화제가 됐는데요. 인형과 키링을 구매하려고 전날 밤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이 캐릭터에 무엇이 있길래 저렇게까지 좋아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귀여운 캐릭터는 많습니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더 많죠. 스마트폰만 켜면 웃긴 영상과 신기한 이미지가 끝없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어떤 콘텐츠는 빠르게 잊혀지고, 어떤 캐릭터는 돈과 시간을 들여 사고 싶어지는데요.
치이카와의 인기는 이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기 좋은 사례입니다. 오늘은 『트렌드 코리아 2027』이 제시한 ‘권태사회’라는 키워드와 함께, 지금 소비자가 무엇에 지루해하고 무엇에 마음을 주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권태사회, 볼 것이 없어서 지루한 게 아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7』에서 소개된 ‘권태사회’는 자극과 도파민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과잉형 권태’가 만연한 사회를 의미합니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했던 과거와 달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접하면서도 금세 싫증을 느끼는 상태라는 것이죠.
숏폼을 끊임없이 넘겨보다 잠시 멈추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좋습니다. 스크롤을 내릴 때 마다 항상 새롭고 재미있는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다만, 무엇을 봤는지 떠올리려 하면 잘 기억나지 않죠. 시간을 보냈지만 특별히 남은 것은 없는 상태죠.
마케팅 실무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고자, 자극과 후킹의 강도를 점차 늘려가는 추세입니다. 첫 3초를 더 후킹하게 만들고, 카피를 더 과감하게 쓰고, 예상하지 못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식입니다. 소비자의 스크롤을 멈추게 해야 하니 필요한 시도이기도 합니다.
다만, 광고나 콘텐츠를 보고 난 뒤에도 우리 브랜드가 인지될 수 있을지는 다른 차원의 얘기이긴 합니다. 표현의 강도만 높였다면 다음에는 더 강한 표현이 필요해지겠죠. 경쟁사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면, 광고는 갈수록 요란해지는데 브랜드의 차이는 오히려 흐려지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즉, 권태사회에서 브랜드가 풀어야 할 문제는 소비자의 클릭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입니다.
2. 치이카와, 귀엽지만 만만하지 않다
치이카와는 일본 작가 나가노가 만든 만화에서 출발한 캐릭터입니다. 국내에서는 ‘먼작귀’, 즉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죠. 둥근 얼굴과 작은 몸, 단순한 표정만 보면 편안하게 즐기는 캐릭터 같은데요.
그런데 캐릭터 스토리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 작고 귀여운 캐릭터들은 일을 하고,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실패를 겪습니다. 일본 간사이TV가 소개한 에피소드에서는 치이카와와 함께 합격하고 싶어 공부했던 하치와레는 시험에 붙고, 치이카와는 떨어집니다. 귀여운 외형 안에 노력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현실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른설정’은 캐릭터의 귀여움에 반전을 더해주는 요소가 됩니다. 행복하게 살 것처럼 생긴 캐릭터들이 의외로 고된 삶을 살아가니까요. 처음에는 그 간극이 호기심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좋아하게 되는 이유까지 ‘반전이 있어서’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순간의 미스매치도 익숙해지면 새롭지 않기 때문이겠죠. 반전의 독특함과 새로움이 떠나간 자리에서 캐릭터를 지속적으로 좋아하게 만드는 힘은, 그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친구와 함께 잘되고 싶었는데 나만 뒤처졌을 때의 마음. 열심히 준비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의 당혹감. 남을 축하해주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실패가 서러운 감정은 어른에게도 낯설지 않죠.
‘귀여운 애가 열심히 일도 하네..?’라는 호기심의 마음에서 시작해서, 그 안에서 본인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 캐릭터는 단순히 캐릭터가 아닌 지금의 삶을 투영하는 하나의 특별한 매개체가 되죠.
3. 현실이 힘든데, 왜 고단한 캐릭터를 좋아할까?
치이카와를 단순한 현실 도피나 힐링 콘텐츠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을 잠시 잊으려고 보는 만화인데, 그 안에서도 노동과 불안, 실패가 등장하니까요.
저는 치이카와가 주는 위로가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는 시험에 떨어지고, 겁을 먹고, 마음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캐릭터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죠. 오히려 다음에는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실패에는 꽤 엄격합니다. 준비가 부족했는지,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게 되죠. 그런데 좋아하는 캐릭터가 비슷한 일을 겪으면 조금 너그러워집니다. 실패한 모습도 귀엽고, 속상해하는 마음도 이해가 되니까요. 치이카와를 응원하다 보면, 그 캐릭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신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팬이 이런 이유로 치이카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생김새가 마음에 들 수도 있고, 특정 캐릭터의 행동이 웃겨서 좋아할 수도 있겠죠. 다만, 귀여움으로 시작한 관심이 오랜 애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캐릭터에게 자신의 감정을 겹쳐볼 수 있다는 점을 빼놓기는 어렵습니다.
권태사회 속 우리가 지향해야할 방향성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장면을 보고 순간적으로 재미를 느끼는 것과,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을 주는 것은 다릅니다. 치이카와에게 애정이 생긴 사람은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왔다는 이유와 함께, 좋아하는 캐릭터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다시 찾아오게 되는 것이죠.
4. 같은 키링도, 아는 사람에게는 다른 상품이다
이렇게 쌓인 감정은 상품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치이카와를 모르는 사람에게 키링은 작고 귀여운 장식입니다. 비슷하게 귀여운 상품이 있다면 가격이나 디자인을 비교해서 고를 수 있겠죠. 반면, 이야기를 알고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표정과 자세가 특정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의 형태는 같아도, 구매자가 받아들이는 가치는 달라집니다. 누군가에게는 인형 하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까이 두는 방법인 셈입니다.
가방에 달린 키링이나 책상 위에 놓인 인형은 화면 속에서 만났던 캐릭터를 일상으로 데려옵니다. 콘텐츠를 볼 때 느꼈던 즐거움과 애정을 물건을 통해 이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마음이 생긴 사람에게는 다른 귀여운 인형이 충분한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귀여운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그 캐릭터’이기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이니까요.
브랜드가 캐릭터 협업을 검토할 때도 이 부분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유명한 캐릭터를 제품에 넣으면 일단 눈길은 끌 수 있습니다. 다만, 팬들이 그 캐릭터의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따라 갖고 싶은 상품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겠죠.
어떤 표정에 반응하는지, 어떤 관계를 좋아하는지, 어떤 장면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지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캐릭터의 인지도를 빌리는 것에서 나아가, 팬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애정을 상품에 잘 담아내는 것입니다.
5. 브랜드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치이카와의 사례를 모든 브랜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제품에 캐릭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모든 광고가 위로를 건네야 하는 것도 아니겠죠.
다만, 고객이 자신과 관련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030 직장인’, ‘바쁜 현대인’이라는 타깃 설정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순간에 관심을 가질지까지 알기 어렵겠죠.
가상의 간편식 브랜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바쁜 직장인을 위한 한 끼’라는 설명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직장인이 같은 간편식을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늦게 퇴근해 요리할 힘은 없는데, 오늘도 과자로 저녁을 때우기는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다 최소 주문 금액과 배달비를 보고 망설이는 사람도 있겠죠. 같은 직장인이라도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제품에 기대하는 가치와 반응하는 메시지가 달라집니다.
전자의 고객에게는 적은 수고로도 식사를 챙길 수 있다는 점이, 후자의 고객에게는 혼자 먹을 만큼만 합리적인 비용으로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이 구매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고객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할수록 어떤 장점을 먼저 설명해야 할지도 분명해지는 것이죠.
치이카와 역시 막연하게 ‘힘내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해서 공감을 얻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 떨어지고, 친구와 함께 잘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보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과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브랜드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고객이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고객을 이해한다는 말보다, 어떤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콘텐츠와 제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겠죠.
자극적인 표현과 새로운 연출은 앞으로도 필요할 것입니다. 소비자의 관심을 얻지 못하면 준비한 이야기를 전할 기회도 없으니까요. 다만, 어렵게 얻은 관심 뒤에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는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치이카와의 귀여운 외모 뒤에는 어른에게도 낯설지 않은 삶이 있었습니다. 우리 브랜드의 눈길을 끄는 광고 뒤에는, 고객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낄 만한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